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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JU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늘 공부하는 열정적인 연극인, 김덕주"
안녕하세요. 극단 오락 대표 3년차이자 현재 한국연극협회 완주지부 부지회장을 맡고 있는 ‘김덕주’라고 합니다. 지역에서 연극으로 작품에 따라 ‘배우’가 되기도 하고 ‘연출’, ‘예술감독’, ‘무대감독’ 등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극단의 대표로서 ‘총괄’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네요. 구조적으로 나눠서 일을 진행하긴 힘드니까요.
제 특징은 겉으로 보여지는 부분은 엄청 조용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것 같지만 사실 마음속에는 아직도 열정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도전합니다. 지금은 실험적인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채널도 훨씬 많아졌지만 과거엔 연극이 주로 그런 역할을 했어요. 시대를 반영하는 깊이 있고 사회비판적인 내용의 작품을 통해 엄혹한 현실을 문화적으로 풀어내는 연극인들의 자부심이 매우 강했어요.
연극은 종합예술이라고 하잖아요. 무대에서 어느 시간대나 무궁무진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인물분석이나 작품분석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다양하게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 장르가 있지만 연극 분야에 꽂힌 것 같아요. 연극을 함께했던 동료들은 저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은 잘 해왔던 것 같아요. 그래도 “열정적인 배우”, “늘 공부하는 배우”로 기억해주면 좋겠네요.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연극은 고등학생 때부터 관심이 많았고요, 대학 때 서클에서 처음 시작했어요. 저희가 처음 연극을 시작했던 80년대에서 90년대 초는 특히 문학작품 위주의 극중 셰익스피어 작품 같은 번역극이나 마당극이 인기가 좋았어요. 그래서 연극의 바탕이 되는 기본기가 탄탄해 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지도를 하거나 무대에 설 때 그 깊이에 있어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느껴요. 전공은 사범대에서 역사교육학을 했는데 계속 서클 활동을 하면서 3학년 무렵 선배들이 마침 지역 극단을 창단했어요. 자연스럽게 극단에 합류하면서 ‘전국연극제’라고 현재는 ‘대한민국연극제’로 이름이 바뀐 규모 있는 연극제에서 데뷔를 하게 되었습니다.
첫 작품에 창이 들어가 있어서 그 당시 명창이신 분에게 사사 받으며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기억이 나네요. 이후에 소리를 계속 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는데 연극이 좋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거절했지요. 그게 벌써 35년 정도가 되었네요.
가장 힘들었을때와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였나요?
극은 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에요. 좋은 작품은 끊임없이 조율하고 맞춰가는 과정에서 나오다 보니 그 부분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랑 드라마와는 다르게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접하기에 쉽지 않다보니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만들어 가는 과정이 다 쉽지 않죠. 그래도 슬럼프가 올 시간이 없었어요.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계속 배우느라 연극 석사학위도 취득하고 사회복지를 공부하기도 했거든요. 지속적인 지식의 습득 및 체득이 무대에 오르고 아이들을 지도할 때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극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하고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과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 많이 배우게 해주었던 것들이 저를 행복하게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연극을 하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활동경력 및 최근 활동은?
주로 전주랑 완주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어요. 활동지역에 대한 부분이 엄격해지기도 했고 완주에서 저를 조금 더 필요로 해주셔서 현재는 이쪽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극단 오락이 벌써 7~8년차 정도 되었네요. 매해 정기공연도 하고 꾸준히 창작극도 발표하면서 활동하고 있어요. 작년까지 “Love is“라는 작품도 발표하면서 준비하고 있는 시나리오 작업이 있었는데 조금 미비한 상황이어서 계속 보완·수정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완주연극협회에서 준비하고 있는 창작극을 협업의 형태로 함께 진행할 예정이에요. 연습이 이제 막 시작 되었는데 연말에 발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활동내용과 기쁨을 주는 순간은?
무대에 오르는 순간은 어떤 역할에 있던지 기뻐요. 아이들이 극을 보려고 예술회관 앞에서 긴 줄을 이루고 있거나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을 보면 진짜 좋지요. 80년대부터 활동을 해오다 보니 ‘전국연극제’에 나가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순천 시립극단의 객원 배우로 좋은 작품을 공연했던 것도 기억에 남네요. 그 이외에도 「태」, 「오장군의 발톱」, 「리얼리즈 신의 아그네스」, 「혈맥」 등 좋은 작품을 공연했는데, 「햄릿」을 우리나라 버전으로로 바꿔서 공연했던 것처럼 작년에 공연했던 「Love is」도 그렇게 접근해서 제작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 나왔어요.
작품을 만들 때 어디서 주로 영감을 얻고, 표현하고자 하나요?
기존엔 발성이나 작품분석과 같은 기본적인 부분에서 영감을 얻었다면 지금은 ‘기다리기’를 통해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전체적인 조화를 생각하면서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주로 하다보면 제가 다 지시하고 따르는 것보다 배우들을 기다려주고 간단한 연출선만 잡아줬을 때 훨씬 완성도가 생기는 매력을 발견했어요. 거기서 저도 배우도 함께 발전하고 성장하게 되는거죠.
저는 특히 인물분석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편이에요.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면면이 결국 그 작품 전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가장 기본이 인물분석이라고 생각해요. 인물분석이 되면 시대분석이 되고, 그럼 또 자연스럽게 의상분석이 되잖아요. 그것들이 가능해지면 극을 관람하는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가장 고마웠거나, 덕분에 힘을 내고 있는 분이 있다면?
3년 전부터 전북의 여성 연극인들과 조합을 결성해서 모이고 있어요.
거창하게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남 자체로 많은 힘을 얻어요. 지역의 시립극단에서 현역배우로, 극단 대표로, 학교 연극 지도 등으로 좋은 점, 어려운 점을 같이 의논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고맙게 느껴지는지 몰라요.
모임하고 있는 전북 여성 연극인 중 3명과 함께 우리의 삶에 대한 부분을 연극으로 발표할 계획이었는데 현재는 조금 주춤한 상태에요. 예전에는 무리하게 시도를 했다면 지금은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연출, 기획 그 무엇이나 흘러가는대로 어떤 형태든 도움이 되고 참여할 수만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제가 대사를 잊지 않고 암기력이 허락되는 날까지는 계속 극을 하고 싶어요.
어려운 환경이지만 함께 무대에서 호흡하는 선·후배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힘이 되고 늘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완주에서 예술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전주에 제가 소속되어 있던 단체가 불미스러운 일로 해체되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서 활동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진짜 나를 필요로 하고 도움이 되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오랜 시간 지역에서 같이 연극했던 ‘정상식’ 완주연극협회 지부장님께서 마침 불러주셔서 함께 하고 있는데 지역의 여건이 연극인들이 활동하기에 힘든 것 같아요.
나를 한줄로 표현한다면?
“열정적인 연극인”
한아름 배우가 김덕주 연극인에게 보내는 한 마디
"고요한 태풍의 눈을 떠올리게 하는 열정의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