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하나 된 세상. 예술로 꽃 피는 완주.
WANJU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대충 막 사는 작곡가, 김민경"
음악, 소리는 나를 표현하는 도구
저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5세경부터 피아노와 첼로로 음악을 시작하였고, 이후 서울시립합창단을 거쳐 선화예고에서 작곡을 전공하며 “음악, 소리는 나를 표현하는 도구 중 저에게 가장 손에 익은 것이었다” 는 것이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직업에 대한 꿈이 확실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릴적에는 생각이 없는 돌멩이가 되고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7년 귀국 후 대한민국실내악작곡제전 IV에서 “MU II“를 발표, 이듬 해 조수미의 ‘missing you’, 드라마 ”베토벤바이러스“의 편곡을 맡으며 전문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클래식 기반 현대음악 작편곡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절대음악으로의 현대음악을 작곡하거나 타장르 예술가들과 협업하여 멀티미디어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며, 기능음악으로는 무용, 방송음악을 만들기도하고, 연주자들의 공연 혹은 음반을 위한 곡을 작편곡하기도 합니다.
현재는 강아지를 세 마리 키우고 있고,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살다가 갑자기 시골로 와서 오래된 구옥에서 기름을 때며 살고 있고, 혼자서 사는 큰 애기이고, 할머니들과 은근히 잘 어울리는 것이 저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현대를 살기에 현대음악을 한다.
합창단에서 자주 다루던 르네상스 음악의 담백한 울림을 좋아했습니다. 이후 세상이 들려주던 고전과 낭만, 인상주의, 대중가요 등의 음악은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어 처음에는 빠져들었지만 너무 달고 세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때 일본에서 처음으로 현대음악 공연을 접했습니다.
공연장 사방에서 검은 우산을 들고 노래를 하며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던 소리와 홀 전체가 무대가 되어버린 어두운 공간, 갑자기 내 옆과 특정할 수 없는 방향에서 동시에 들리던 소리들, 그 안에 앉아버린 관객들 사이에서 확정할 수 없는 미상의 아름다움을 처음 음악으로 느끼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무서워서 우는줄 알고 위로해 주었는데(혹은 아직 공연 중이니 조용히 하라고) 저는 그냥 아름다움에 취해서 우는 중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 작곡가의 작품이 특별히 좋았거나, 제가 무엇인가를 느꼈다기보다 작곡가와 청중간 그 시대에 함께 느꼈던 것 중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그날 그 음악이 저에게 특별히 다가왔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장르에 꽂혔다기보다는 현재를 살기에 현대음악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슬럼프가 있었다면? 또는 가장 힘들었을 때와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였나요?
예전에는 슬럼프가 오면 그것에 휘말린 나만을 보느라 어쩔 줄 몰라하며, 극적인 감정에 빠져 바닥까지 치고 내려가 스스로 다시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아주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극복하였습니다.
이제는 슬럼프에 빠지는 것이 살면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호들갑 떨 필요도, 숨길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그럴 기미가 보일 때 다른 방식의 준비를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문제가 생길만한 부분들을 해결해보려고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 슬럼프라는 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을 것을 바랄 때 오는 것 같아서 슬럼프가 오려는 기분이 들 때 그 현상을 정확하게 생각하려고 반복해서 시도하다 보면 어느 정도 주제 파악이 되면서 비능률적인 시간의 원인이 저절로 해결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던 나의 모습과 현재 나의 모습이 동떨어져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없어지고, 사회가 바라는 나도, 부모님이 바라는 나도 없는, 결국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애매한 시간에 저는 극도로 지치고 예민해져서 밤에는 룸노래방에서 주방일을 하며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계약해 놓은 곡들의 마감일은 다가오는데, 곡은 하나도 못 써도 밤마다 과일 안주를 열심히 조각하다 보니 업장 사장님이 솜씨가 좋다고 시급을 올려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가장 행복할 때는 요즘 몇 년입니다. 누군가에겐 미련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남들 일할 때 시골에서 평일에 놀면서 일하고 낮잠도 자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나를 보면 예술가라는 직업 참 좋다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활동경력 및 최근 활동은?
저의 짧은 프로필:
작곡가 김민경은 비엔나 국립음악대학을 작곡 및 전자음악을 전공하며 심사위원 만장일치의 최고점으로 졸업하고, 파리고등국립음악원(CNSM)의 교환학생으로 발탁되어 수학하였습니다.
광주문화재단 관현악 창작곡 공모전 입상, 테오도르 쾨르너 대통령상 (Theodor Korner Preis) 작곡부문 수상, 오스트리아 문화교육부 장학금 수혜 등의 다수의 수상경력과 함께 오스트리아 대통령궁의 초청으로 작품발표연주회를 가졌으며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市)와 펠트키르헨 박물관의 위촉을 받아 시즌개막연주를 하였습니다.
귀국 후 한양대, 숙명여대 등의 대학에서 강사를 역임하며 동시에 국립무용단, 대전시립무용단 등 다수의 단체와 협업을 통한 무용음악 및 설치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조수미, 리처드 용재 오닐 등 클래식 음악가들의 음반 및 공연분야, 그리고 김종학프로덕션의 “베토벤 바이러스”, KBS FM”생생클래식” 등의 방송 분야를 어우르는 폭넓은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김민경의 작품 중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12월의 노래”는 Deutsch Grammophone 음반사를 통해 발매되었으며, 또한 KBS 1TV 특별생방송 새해맞이 음악회를 통하여 “Arirang Impromptus”를 초연하며 다양한 장르의 작,편곡가로서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2020년 완주문화재단의 한달살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후 문화예술도시 완주에 정착하여 음악 외 시각예술, 청소년문화예술, 생활예술 등 다양한 분야로 관심 분야를 넓혀가며 문화예술단체 소리•점•빵을 운영 중입니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것 중 초겨울에 “호우(好雨)”라는 제목으로 뉴에이지 음악을 발표 할 계획입니다.
기억에 남는 활동내용과 가장 ‘애정’하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매번 새로운 시도는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해도 되나 싶은 것을 한다고 해버리고, 어떻게 하는 건지 자세히 모르고 시작한 작업들도 우위를 가릴 것 없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애정하는 작품 중 20살 때 썼던 첼로곡 MU 시리즈를 애정합니다. 클래식 작곡은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큰 선생님께 들어가기 전 시작한 곡들입니다. 소리의 깊이, 나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있을 때의 저의 모습이 가장 많이 담겨있는 곡들인 것 같아 어수룩하지만 가장 순수하고 사랑스럽게 들립니다.
작품과 관련해 어디서 영감을 얻고, 작업하는데 있어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작업은 주로 집 컴퓨터 앞에서 합니다.
어느 순간, 어떤 곡, 어느 연주자에 의해서 갑자기 어떤 소리가 완벽하게 울릴 때가 있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걷고 있는 내 앞에 강이나 바다가 있어서 더이상 갈 수 없다고, 당신의 한계를 보여주며 더이상 헤매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는 친절한 안내자처럼, 상상속의 완벽이 아닌 귀로 들려주는 완벽의 미를 내가 함께 있는 공간에서 울림으로 들을 수 있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완벽한 안정감과 희열을 느낍니다.
저는 영감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작품은 평소에 보이고 들리고 경험하는 것 중에서 동기를 시작합니다.
요즘들어 주변에 다른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고 밤을 새는 일도 이제 잘 못 하겠습니다. “그냥 자고 내일하자~” 라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여러 주제로 작품을 표현하면서도 항상 표현하고자 하는게 있다면?
‘어딘가에 무엇이 있을 것 같아’
저는 항상 사람이 왜 사는지 궁금했고 그런 이유로 인생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데, 여전히 조금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살다보면 뭔가 있지 않을까?”라며 짐작이라도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매 장면들을 대충대충 넘어 가는 일입니다.
작품에서도 클라이막스를 넣으려고 하지 않고, 극적인 큰소리, 혹은 극적인 작은 소리 뒤에 항상 여운을 두어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도록 배치하려고 합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결말을 낼 능력은 없으니 결말을 열어놓고자 하는 작은 시도라도 해놓으려고 합니다.
나는 답을 모르니, 내 곡에도 답이 없고, 그냥 어딘가에 무엇이 있을 것 같다고 조금만 말하고 싶은데...라고 중얼거리기...
(물론 기능성 음악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다릅니다.)
가장 고마웠거나, 덕분에 힘을 내고 있는 분이 있다면?
저요. 정말 다행히도 해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인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제가 고맙고 덕분에 삶이 아주 무의미한 것 같지는 않아서 힘이 납니다.
(하지만 가끔 완주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인생은 아무 의미 없는 거라고 하실 때마다 진짜일까 깜짝 놀랍니다. 오늘도 어떤 할머니가 “이번 생은 다 끝났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앞으로의 예술활동 계획과, 대중에게 어떤 작가로서 기억되고 싶은가요?
완주에 이주한 이후로 개인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커리어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 그동안의 일들이 퇴비처럼 쌓여 음악으로 다시 터져 나오기를 기다리는게 계획입니다. 꿈은 행복하게 살다가 고통없이 죽기입니다.
옆집에 사는 음악가라고 시끄럽지 않았던 사람, 사람들에게 큰 피해주지 않았던 사람. 예술가라고 이상한 행동 하던 사람이 아닌, 전반적으로 멀쩡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완주에서 예술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오늘, 지금의 내가 완주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로 행운입니다.
예술인이어도 좋고, 강아지여도 좋고, 농부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지에 달린 문제이겠지요.
나를 한줄로 표현한다면?
“대충 막 사는 작곡가”
여은희 작가가 김민경 작곡가에게 보내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