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하나 된 세상. 예술로 꽃 피는 완주.
WANJU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사라짐에 가까워지는 것들을 재배치하는,
서수인 작가
서수인 작가의 작품은 시간에 관한 인식과 사유로부터 시작된다. 일상에서 너무 당연하고 익숙해서 망각하고 사는 것들이 문득 깨달아지는 순간, 전과 같은 일상도 다른 의미를 가진다. 여기 낡고 헤진 의자가 있다. 아무도 앉을 수 없는 고장 난 의자는 의자인가 의자가 아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의자도 여전히 의자로 불린다.
작가가 문득 깨달은 것은 시간의 흐름이다. 시간은 계속 흐르지만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매순간 감각하기는 쉽지 않다. 당연하고 익숙한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 순간, 생명과 죽음의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 빠르게 흩어지는 도시의 시간과 멈춰선 듯 천천히 흐르는 자연의 시간이 작가의 사유로 흘러들어온다.
“사람이 사라진다는 게, 늙고 죽는 게 자연적인 거잖아요. 늙어서 죽을 때까지 함께 산 동물이 많았어요. 살아있던 생명이 죽어서 딱딱해진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생각했어요. 스무 살이 되었을 때도 내가 늙고 있구나, 죽어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죠. 잘 죽고 싶고 잘 버림받고 싶어요.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질문을 했던 거 같아요.”
고장 난 의자는 잘 버려지기 위해 작가의 작품 안에서 재배치된다. 미술관의 조명을 받으며 작품 속에서 우리에게 흐르는 시간을 인식시켜준다. 젊고 늙고 상관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사라져가는 과정이다. 한 사람이 한결같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과연 젊고 건강한 몸을 가진 이보다 늙고 고장 난 몸을 가진 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적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가가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무엇이 아닐까. 이를테면 ‘의지’ 같은 것.
고장 난 이미지를 통해 작품 속에서 시간과 의지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작가는 구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다양한 매체에, 다뤄보지 않은 도구에 도전한다.
“완주에서는 친구들도 계속 똑같고 주변 풍경도 변함이 없고 그렇게 살았는데 대구에서는 시간이 엄청 빠르게 느껴졌어요. 공간이 너무 좋아서 제가 정을 붙였는데 다음 주에 가니까 사라져 있어요. 그런 것들이 크게 와닿았죠. 흩어지고 있는 시간을 고착화시키고 싶은 시간으로 그리고 싶어서 나이프를 이용했어요. 붓으로 그리니까 입시미술에 익숙한 표현 방법으로 자꾸 모사를 하더라고요. 아예 그런 형태를 없애려고 나이프로 그렸죠. 그런데 다시 완주 돌아와보니까 거의 십 년이 지났는데 풍경이 똑같아요. 움직이기는 하는데 멈춰있는 듯한, 같은 한 시간인데도 오늘따라 되게 시간이 안 가네, 하는 것처럼 제게 느껴지는 그런 시간의 흐름이 있었던 거 같아요.”
“설치나 영상이나, 많이 안 해봐서 그럴 수도 있는데 다루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영상 작업이 결과물을 보기엔 간단해 보여도 그 안에 다양한 것들이 숨어 있는 건데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내가 따라해가지고 전시를 했을 때 너무 이상하지 않을까? 너무 그냥 한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설치는 어떻게 해야하지? 여러 가지 복합적인 걱정이 있어요. 계속 평면으로 페인팅만 하니까 뭔가 도전을 하고 싶기는 한데 개인 작업에서 갑자기 ‘뿅’ 도전하긴 너무 어려우니까 그룹 만들어서 힘든 거 한번 해보자. 이렇게 된 거죠. 같이 하면 든든하기도 하고 둘이니까, 머리가 두 개니까.”
동료 작가와의 협업을 ‘머리 두 개’짜리 작업이라고 유쾌하게 표현한다. 2021년 완주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아 강유진 작가와 함께 비틀레마 그룹전을 준비하고 있다. 청년이자 예술가로 맞닥뜨리는 사회 현실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저는 어디 직장을 다녀본 적은 없어요. 공공미술 사업, 파트타임, 예술인 파견사업 이런 거. 그리고 여러 가지를 하는데, 방과후 강사도 했다가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도 했다가 동화책 삽화도 그리고, 강의도 나가고, 그림 빌려달라는 데 빌려주고, 그림 그려달라고 하면 그려주고, 이런 거 다해요. 작업을 계속하고 싶으니까 이걸 위해서 다른 걸로 지원을 해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너무 커져버리는 거죠. 예술가 아닌 청년들도 그렇고, 40~50대 소위 안정권에 드신 작가분들도 다 고민을 하고 계시고요. 계속 그렇게 하는 거구나. 그렇게 버티는 거구나, 그런 생각은 해요”
2021년에는 팔복예술공장의 레지던지 작가로 입주해있다. 8월에 열릴 계획인 기획 전시에서도 작가가 붙잡는 시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어렸을 때, 5살 때부터 2년 정도 고산에 살았거든요. 만경강 주변으로 물놀이하러 오는 사람들이 자고 가는 그런 숙박업소를 운영하셨어요. 최근에 어른이 된 뒤로 찾아갔는데 냄새가 똑같은 거예요. 물곰팡이 냄새 같은 거. 그곳이 저희가 마지막으로 살고 나서 아무도 살지 않은 곳인데, 살짝 화려했을 그 당시로부터 남아있는 용 동상이나 분수대, 펭귄 상을 담담하게 그리고 낡은 건축물의 이미지를 뼈대로 전시해도 재밌겠다 싶어요.”
작품에 대한 구상을 막 마치고 밤낮없이 작업실에서 그리고 또 그린다고 한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서 그림을 보면 집중해서 그림만 그릴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고.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한 날도 일주일 넘게 작업실에서 그리고 잠들고를 반복하다 겨우 집에 들른 날이었다. 작가의 작품 속에 작가가 감각하는 시간이 의도적으로 붙잡혀 있다면, 실제 작가의 시간은 작품에 붙들려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