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하나 된 세상. 예술로 꽃 피는 완주.
WANJU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몇 년 전 동네 책방에서 작은 그림 전시가 열렸다.
반가운 마음에 그림 구경을 갔고 나무 액자에 담긴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키가 큰 나무숲, 유난히 높은 하늘, 풀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언덕, 그 풍경들 속에 언제나 혼자 앉아 있는 소녀에게 오래도록 눈이 갔다.
늘 혼자 있는 소녀가 외로워 보이다가도 나도 그 곁에 가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소리가 스치는 것 같고 작은 물웅덩이에 새들이 내려앉아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느 풍경에서나 혼자 있는 소녀가 순간들을 충만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목련꽃이 피기 시작한 3월 봄날이었다.
거짓말처럼 눈이 쏟아지는 오전, 최세령 작가의 봉동 작업실 ‘스튜디오 해봄’을 찾았다.
그이는 따뜻한 차를 내어줬다. 작업실에 놓인 그림들이 익숙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몆 년 전 동네 책방 전시회의 주인공이었다. 이런 우연이!
(21년 첫 전시 '시골소녀의 사생활' 작품 1)
Q. 2021년 작가님 첫 전시회 제목은 ‘시골소녀의 사생활’이었죠. 저도 그 전시회에서 작가님의 그림 한 점을 샀습니다만^^
첫 전시를 통해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만났던 그때 이야기가 궁금해요.
A. 고산면의 독립서점 ‘베르’에서 처음 전시를 한 것이 큰 변곡점이었어요.
그동안은 저 혼자 취미로 그리고 누구에게도 보여줄 곳이 없었죠. 인스타그램으로만 소통하다가 공간 전시를 통해서 관객이 생긴 거죠.
사람들이 찾아와서 ‘너무 좋다’는 말을 직접 듣게 된 거죠. 그게 너무 좋았어요.
사람들을 만나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어요. 그때 기분은 구름을 탄 거 같았어요.
지금 돌아봐도 그때 그림들이 마음에 들어요.
(21년 첫 전시 '시골소녀의 사생활' 작품 2)
Q. 그림 속에 늘 혼자 있는 소녀가 등장해요. 작가님의 어린 시절 같기도 하고요.
A. 그림 속 풍경들은 제 어린 시절 마을 뒷산의 숲속 풍경들을 그린 거에요.
시골 동네에 아이들이 많지 않아서 저는 주로 혼자 몽상하는 어린이였어요.
하나 있는 오빠랑 놀려고 쫓아다니면 느린 저를 놓고 늘 쌩하고 사라졌죠. 그래서 혼자 쓸쓸했어요.
그러니까 매일 뒷산에 혼자 올라가서 앉아 있곤 했는데 그때 풍경을 그림에 담아내고 싶었어요.
무언가 표현하고 싶었던 갈망의 시작은 그 숲 속이었었던 것 같아요. 가장 행복했던 때였어요.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하루하루를 정말 충만하게 살았던 거 같아요.
그 숲 속 아지트에 앉아 구름, 시냇물, 나뭇잎을 몇 시간씩 보기도 했죠.
혼자서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자연소재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어린 시절부터 늘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었어요.
Q. 표현하고 싶은 갈망을 꽤 오랜 시간 품었다가 드디어 발현하게 되었네요.
A .맞아요. 제 나이 마흔 살이 돼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거죠.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다들 오랜 시간 홀로 작업한 뒤에 전시를 시작하는데 저는 좋은 기회로 전시를 먼저 시작하게 된 거죠.
일단 사람들에게 내 그림을 선보이고 난 후에는 저 스스로 계속 길을 찾아야 했어요.
미술 전공자에 대한 부러움, 목마름이 있었는데 그럴 시간에 뭐라도 더 해보자는 생각이 있었죠.
지금까지는 회사 다니다가 결혼해서 아이 낳고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았는데 집에서 계속 혼자 그림만 그리면 그걸로 끝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봉동에 작업실을 얻게 되었어요. 내 공간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의 차이는 정말 크더라고요.
작업실이 생기면서 '엄마', '주부'라는 역할을 넘어 작가로서 활동의 폭을 넓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40대를 기점으로 온 세상으로부터 많은 응원을 받았어요.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문창과에 가서 글을 계속 써보라'는 사람들의 응원 덕분에,
브런치 스토리에 '평범하지만 평균은 아닙니다'라는 글도 연재하게 되었죠.
저는 저에게 응원해주지 않는 사람은 잘 안 만나요.^^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을 굳이 만날 이유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를 응원하고 환호해주는 긍정적인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힘을 얻고 있어요.
Q.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그림이나 글들이 솔직해서 참 좋아요.
자신의 한계, 의기소침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사람 같아요.
어느 날은 잔뜩 구겨진 종이가 되었다가도 다음 날 햇빛에 보송하게 마른 하얀 이불 같기도 하고요.
A. 나도 뭔가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지만 그림으로 돈 버는 것이 참 어려워요.
작업실을 얻기 위해 열심히 출강도 다니고 일러스트외주작업도 하죠.
남편 도움 없이 내가 돈 벌어서 스스로 내 길을 찾고 싶어요.
지금 당장 현실이 힘들다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멈추게 된다면 분명 후회할 거 같더라고요. 멈추면 다시 시작하기 더 어렵잖아요.
저는 지금 찾은 이 디지털드로잉을 취미로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림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캘리그래피, 사진, 뜨개질 등 취미생활로 끝난 것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남편은 저를 ‘시즌제’라고 놀려요. 길어야 3개월이라고.
그런데 남편이 저를 곁에서 봤을 때 제가 가장 오래 열심히, 즐겁게 집중하는게 그림이더래요.
그림 그릴 때 제일 좋아보인다고. 그래서 내가 진짜 그림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되기도 했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장비 중에 가장 많이 쓰는 아이패드는 남편이 저에게 선물해준 거여서 특별해요.
더욱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디지털드로잉 작가의 작업실)
최세영 작가는 살아내는 동안 마음에 스민 경험과 감정, 세상에 건네고 싶은 말을 더는 가두지 않았다.
글이나 그림, 어떤 형식이든 “이걸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라는 갈망이 계속 길을 만들어 낸다.
그가 만들어낸 길은 순탄치 않았지만, 그 걸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표현을 갈망하는 누군가에게, 최세령 작가는 분명 말 없는 용기를 건네는 사람이다.
* 본 사업은 완주문화재단의 '완주예술발굴 기록화' 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지역 소식지 "2025 5월 완두콩 153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