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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라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들 - 옹기 작가 전설희
전설희 씨는 옹기 작가다.
옹기 하면 보통 장독 같은 항아리나 뚝배기를 먼저 떠올리는데 그녀는 실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그릇을 만든다.
주로 차 도구다.
옹기토와 약토, 나뭇재 같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재료를 사용해 만들지만
방식은 상감 같은 자기의 기법을 일부 응용하고 있다.
첫 전공이었던 금속공예는 그녀와 잘 맞지 않았다.
학교생활 적응도 쉽지 않았다. 잠깐의 휴식기이자 탐색기였던 20대 중반에 그녀는 제주에서 한동안 지냈다.
어느날 산책을 하는 데 아주 작은 공방이 있어 들어갔더니 사장님이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 ‘저 이거 배우면서 여기서 일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 뒤로 그 가게가 안 좋아져서 그만두게 되었지만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제주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마침 거기에 도자 작업하는 작가님이 있었어요.
출근 도장 찍듯 매일 그 공방을 들락거리고 또 대학에 진학해 전공하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Q. 왜 옹기였나요.
처음 도자기를 배울 때 책에서 옹기의 자연 환원성에 관한 글을 읽었어요.
옹기는 자기에 비해 온도가 낮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만큼 빨리 흙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학부시절 옹기수업을 해주셨던 선생님 덕분에도 확신을 얻었어요.
재료에 대한 실험을 많이 시키셨는데 예를 들면 학교 뒷산에 있는 대나무를 태워서 그 재로 잿물을 만드는 실험을 한다든가,
개펄이나 황토, 야산에 있는 흙을 캐와서 흙 실험을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는데
그런 실험을 하면서 주변에 있는 자연물로 그릇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자기류는 유약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광물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광물은 제가 직접 채취할 수가 없잖아요.
옹기는 제가 직접 다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만들 수 있으니 이 정도면 내가 혼자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단순한 사람이에요. 담백하고 명쾌한 것이 좋아요. 옹기가 그렇게 느껴졌어요.
작업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옹기가 저의 속도와 잘 맞는다는 것이에요.
Q. 환경에 대한 생각이 강하게 작용한 건가요?
처음에는 그랬어요.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사라지는 것처럼 만들었던 것들도 흔적을 안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은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고 또 이걸 해야 제가 잘 지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옹기가 저랑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옹기를 만들고 있으면 그냥 좋거든요.
Q. 도기와 자기의 차이가 뭔가요.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를 합한 말이에요. 옹기는 도기에 들어가요.
백자, 청자, 분청은 자기류에 속하는데 도기와 자기는 불 때는 온도도 다르고 작업 과정도 달라요.
자기류는 초벌과 재벌 이렇게 두 번 불을 때는데 옹기는 거의 한 번 땝니다.
재벌이 없어요. 재료의 특성 때문이에요.
일단 자기류가 초벌하는 이유는 그냥 마른 흙에 유약을 입히면 흙이 주저앉아버려요.
그 형태 유지가 안 돼요. 그래서 만든 형태가 유지될 수 있게 조금 낮은 온도에서 초벌로 단단히 만든 다음에 유약을 바르고
재벌 과정을 거쳐 완성합니다. 도기는 달라요. 그냥 흙 상태의 그릇에 잿물(유약)을 쳐서 구어요.
그래도 형태가 변하지 않아요. 재료의 특성이 다르거든요.
Q. 옹기 재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주세요.
옹기의 재료는 단순합니다. 흙과 천연 유약인 잿물이 다예요.
잿물은 약토와 나뭇재를 섞어 만들어요. 그렇다고 아무거나 쓰는 건 아니에요.
흙은 철분 함유량과 입자를 봅니다. 약토도 실험을 통해 원하는 흙을 찾아요.
옹기에 입히는 잿물은 세 가지 종류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어요.
상감용이 있고, 발색이 조금 다른 두 종류의 잿물을 사용하는데 그릇의 크기나 형태에 따라 그에 잘 맞는 색감을 사용하려고 해요.
약토는 김제에서 직접 퍼 오는데 수비를 해서 고운 입자의 흙을 골라내서 사용하고 나뭇재는 요즘 소나무 재를 구입해서 사용합니다.
소나무 재와 약토의 배합 비율에 따라 발색이 달라져요. 나뭇재가 꼭 소나무일 필요는 없어요.
콩대도 쓰고 참나무나 잡재도 괜찮아요.
작가마다 원하는 발색을 찾아 재료를 선택합니다.
Q. 요새 어떤 작업을 하고 있습니까.
옹기는 숨을 쉰다고 하잖아요? 그릇에 미세한 기공이 많아요.
액체나 향이 강한 음식물을 담고 자주 씻어 재사용해야 하는 생활 식기로는 아무래도 효율성이 떨어지거든요.
저도 생활 식기는 자기를 추천합니다. 몇 년 전까지는 의뢰가 들어오면 자기도 만들었어요.
지금은 옹기만 만들어요. 흙도 다르고 제작 방식도 달라서 힘들더라고요.
결국은 옹기인데 재료가 주는 느낌이 좋아서 자기가 아닌 도기를 택한 것 같아요.
저는 쓰임이 있는 그릇을 만드는 걸 좋아해요.
가끔은 무용한 것을 만들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 쓰임이 있는 그릇을 만들게 되더라고요.
요즘은 옹기의 보관성에 초점을 맞춰서 차를 담는 합과 같은 무언가를 보관할 수 있는 단지 작업을 많이 하고 있어요.
Q. 여러 가지를 시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옹기가 자기에 비해 시장이 굉장히 좁아요.
지금 옹기를 만드시는 분들은 가업으로 해오는 분들이 많아요.
젊은 분들은 옹기를 잘 안 해요. 요새 시장에서 찾아보기도 힘들 거예요.
옹기라고 하면 대개 장항아리나 뚝배기를 떠올려요. 저는 사람들이 옹기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을 바꾸고 싶었던 것 같아요.
투박하고 무겁다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그걸 깨고 싶었어요. 옹기도 충분히 예쁘고 실생활에 잘 쓸 수 있다고.
그래서 일부러 날카롭고 섬세한 옹기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니 백자나 분청의 기법을 옹기에 적용하고 있어요.
현대적이고 세련된 옹기를 보여주고 싶어서 면을 깎아보고 상감 기법을 활용해 그림도 그려보고
뚜껑과 몸통을 달리해보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있어요.
Q.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스케치는 잘 안 하는 편이에요.
예전에는 일부러라도 했는데 요즘은 그냥 몸을 움직이는 것이 더 좋아서 일단 손이 가는 대로 만들고
샘플링 한 것들을 토대로 크기나 형태를 조금씩 수정해서 만들어보며 디자인을 완성해요.
제 작업은 일단 상감을 한 그릇과 상감이 들어가지 않는 그릇으로 나뉘는데요, 두 작업 모두 전기물레 성형을 해요.
건조 후에 후작업을 하고 어느 정도 마르면 잿물을 입혀요.
이때 상감이 들어가는 작업은 잿물을 입힌 후에 조각을 하고 초벌-상감-재벌의 순으로 진행이 되고,
상감이 들어가지 않는 그릇은 잿물을 입히고 완전 건조 후 바로 단벌로 번조를 해요.
Q. 주로 어디서 영감을 얻나요?
예전에는 산책, 꿈, 박물관, 전시회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영감을 받았던 것 같아요.
최근 몇 년간은 그냥 일상에서 보이는 것들에서 얻는 것 같아요. 풀꽃, 달, 비 같은 건데 결국 자연이네요.
그리고 가끔은 예전에 해뒀던 스케치나 작업을 보기도 해요.
좀 더 자유분방했던 초기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을 때도 있어요.
Q. 브랜드가 <옹기밭>이죠? 어떻게 지은 거예요.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작업실이 옹기를 만드는 밭 같았어요.
저는 옹기를 키우는 농부. 당시 공방 겸 집이 논밭 한 가운데 있었거든요.
게다가 제 성이 전씨잖아요. 밭전자.
이름이 한 부분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고요.
Q. 힘든 시기도 있었겠죠?
지난 몇 년간 출산과 육아를 하며 많은 좌절을 겪었던 것 같아요.
작업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작업을 하면서
실수도, 실패도 많이 했던 것 같고 딱히 만들고 싶은 게 없었던 시기이기도 해요.
만들고 싶은 게 없는 데도 작업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는 현실이 무척 불안하고 늘 조바심이 났었어요.
그러던 중에 몇몇 친구들이 차 수업을 함께 듣자고 해서 들었는데 그게 지금 작업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어요.
제가 차 도구 작업을 좋아했다는 게 생각난 거예요.
그동안 차를 마시지도 않으면서 차 도구를 만들다 보니 점점 투박해지고 쓰임이 있는 도구임에도
그 기능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서 어느 순간 차 도구 작업을 하지 않았거든요.
차 수업을 들으면서 제가 사용할 도구들을 한두 개 만들다 보니 점점 만들고 싶은 게 많아지더라고요.
그렇게 차를 통해 힘들었던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어요.
Q.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이 있다면?
늘 지금을 살아내느라 목표나 계획을 세우진 않는데
그럼에도 굳이 이야기해보자면 호기심을 잃지 않고 다양한 재료들을 실험해 보는 것이에요.
작업실 옆에 몇 년 동안 묵혀둔 개펄, 그리고 콩대 재를 활용한 다양한 실험을 해보고 싶은데 자꾸만 미뤄지네요.
느려도 조금씩 재료들을 탐구해 나가는 것이 목표 혹은 다짐입니다.
Q. 어떤 예술가가 되고 싶으세요.
어려운 질문이에요. 옹기를 처음 시작할 때라든지, 학교를 다시 다니면서 도자를 배울 때라든지 저는 그냥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냥 저를 보면서 옹기를 하려는 미래의 작가들이 늘어나면 좋겠다는 생각.
제 작품을 보면서 옹기도 이렇게 무궁무진한 표현이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는 작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게 여전히 힘들어요.
항상 부족해 보이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작품 앞에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는데 좀 당당하게 제 작업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예술가가 되고 싶습니다.
* 본 사업은 완주문화재단의 '완주예술발굴 기록화' 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지역 소식지 "2025 3월 완두콩 151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