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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틈에서 결핍과 희망을 보다 - 이창훈
조소는 깎는 조각과 붙이는 소조를 포괄하는 미술 장르다.
이창훈 씨는 조소 작가다. 그의 작업 재료는 돌이다.
“대학교 2학년 테라코타 수업 시간에 흙 판을 만들어서 논바닥처럼 갈라지는 형태의 작업을 했는데 그게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당시 수업 주제가 시를 표현해보는 것이었어요. 저는 시 대신 김윤아의 노래 ‘야상곡’을 선택했는데
그 가사를 스케치로 구상하는 과정에서 말라서 갈라진 바닥에 꽃이 있는 이미지가 그려지더라고요.
그때 갈라지는 흙 모양에서 선과 면을 보았고 그 정적인 느낌에 매료됐던 것 같아요.”
4학년이 된 이창훈 작가는 졸업 작품을 고민하다 2학년 때의 경험을 떠올렸고
당시 작업을 재해석해보기로 하는데 돌이 깨질 때의 형태가 흙이 갈라지는 모양과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돌과 그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가 처음 갈라진 돌에서 본 건 ‘고정관념’이었다. 지금은 ‘결핍과 고난’을 보고 있다.
때때로 예술가로서 잘 하고 있는 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잘 견뎌내고 있다.
그는 2016년 첫 개인전 ‘틈’이후 지금까지 다섯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전북대학교 미술대학 조소 전공 동문 3명과 함께 완주에서 공방‘ 날맹이 스튜디오’를 운영 중이다.
날맹이는 전라도 방언으로 산봉우리다.
<대교 3D190803A-252>
Q. 어떻게 전업 작가가 되었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만들고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그걸 알고 일반 미술 학원이 아닌 조소 학원을 추천해주셨어요.
그때 조소를 알게 되었죠. 대학 전공도 조소를 택했는데 당시만 해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택했고 먹고 사는 건 다른 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대학교와 대학원을 거치면서 이 작업 활동이 너무 만족스러운 거예요.
거기서 오는 보람이나 성취감이 대단했죠. 그래서 전업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Q. 작품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죠.
처음에는 고정관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갈라진 땅의 모습과 차가운 철 틀이 마치 우리의 현실과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실에서 생겨난 관념과 관습이 고정관념이 된다는 생각을 했고
첫 번째와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그걸 깨뜨리기 위한 노력을 갈라진 돌에 빗대 작품화했죠.
근데 이게 잘 전달이 안 되더라고요. 저만 알고 있는 이야기가 되다 보니까 나중에는 이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좀 직관적으로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뭄이 왔을 때 논바닥이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니까
가뭄과 메마름의 이야기로 메시지를 다시 구성해보자고 생각했죠.
지금은 갈라짐이라는 형태 안에서 빈곤, 결핍,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Q. 고정관념이라는 주제는 사라진 건가요.
흙이 갈라지거나 돌이 깨져 있는 형상을 처음에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껍질을 벗어버리는 개념으로 바라봤던 걸
지금은 메마름, 결핍, 고난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또한 깨뜨려야 할 고정관념일 수 있어요.
변했다고 볼 수 있지만 처음 고민했던 주제가 사라진 건 아닌 것 같아요.
관객들은 제 작품에서 고정관념을 볼 수도, 빈곤과 결핍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됩니다. 무엇을 보던 그건 관객의 몫이니까요.
<인류한기_비(碑)200⨯60⨯810mm 대리석, 오석 2022>
Q. 작업에는 주로 어떤 돌을 씁니까.
첫 개인전 때는 화강암의 일종인 마천석을 썼어요.
오석이라는 까만 돌이 있는데 입자가 곱고 때리면 유리처럼 맑고 얇은 소리가 나요.
그런데 이게 좀 비싸요. 마천석은 그 대체품이었던 거죠.
건물 외장재로 많이 쓰이는데 오석만큼이나 까맣고 입자가 고급스러운 돌입니다. 지금은 대리석을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리석은 조금 더 비싸지만 경도가 화강암에 비해 낮아서 작업하기가 수월합니다. 돌을 가공하면서 몸이 받는 충격도 덜하고요.
Q. 가공하다 돌이 제멋대로 깨지면 어떻게 하죠.
저는 재료 고유의 성질을 이용하고 싶을 때는 스케치 없이 돌을 깨서 작업하곤 합니다.
그래서 돌을 깼는데 스케치한 것과 다른 금이나 형태로 나왔을 때,
그게 마음에 들면 그대로 사용하고 마음에 안 들면 접착제로 다시 붙여 활용합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그런 우연성을 가미한 작업도 많이 있습니다.
Q.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금속 조각이나 흙 작업, 목 조각 등 분야마다 그 과정이 세밀하게는 다르지만 대부분 에스키스라는 스케치를 먼저 해요.
이후 실험적인 작품이나 처음 하는 작업일 때는 기법에 대한 실험을 좀 하고 작업에 들어가는데
그게 아니고 일반적으로 해왔던 작업은 실험까지는 안 하고 그냥 에스키스 스케치하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죠.
작업 전 실험은 재료의 물성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소품 작업을 하고 그다음에 본 작업으로 넘어가는 거죠. 에스키스라고 하면 보통 스케치를 이야기하는 데 조소는 소품을 만드는 과정도 에스키스라고 합니다. 정리하면 평면적인 에스키스, 재료 물성 실험, 입체 에스키스, 본 작업 순으로 진행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Q. 특별히 마음 가는 작품이 있습니까.
최근에 했던 작업이 마음에 들어요. 4회 개인전 ‘인류한기’를 교동미술관에서 열었는데
공연 예술인들이 그 작품을 창작극으로 재해석했어요.
저는 그 공연 영상이랑 이야기를 다시 전시장으로 끌어와 ‘새로 고침: 여생’이라는 5회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 작업이 전체적으로 가장 마음에 듭니다. 색다른 시도가 좋았고 그만큼 성취감과 보람도 컸던 것 같아요.
<인류한기_유(類) 260⨯180mm 대리석 2022>
Q. 어려운 시기도 있었겠죠.
4회 개인전 전에 회의감이 강하게 왔어요. 요즘 말로 현타라고 하죠?
제가 생계를 위해 문화기획 일을 하고 있는데 기획자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예술인가’하는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현대미술이라는 게 워낙 광범위한 데다가 활동하는 작가들도 많잖아요.
그 속에서 내가 하는 게 과연 남들에게 예술로 불릴만한 활동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 거죠.
취미생인지, 에술인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4회 전시를 하고 그걸 다른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주고,
저는 또 그걸 받아서 5회 전시로 잇고 하는 과정에서 그 마음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는 내 작품을 예술로 바라보고 있구나하는 생각과 성취감이 다시 버틸 수 있는 힘을 준 것 같아요.
Q. 어떨 때 자신이 예술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까.
작품 하나 끝났을 때나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뭔가 멋진 걸 만들어 낼 때,
그리고 그게 전시가 될 때 그 순간 순간 예술인으로의 자각과 성취감을 느껴요.
무엇보다 내 작품을 찾아주는 기획자가 있을 때, 즉 전시에 초대받을 때 확실히 내가 예술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되죠.
Q. 끝으로 한 말씀
미술 시장은 항상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작업하는 예술인이 있고, 작품을 보러 와주시는 관객이 계시잖아요.
저도 좋은 작품, 좋은 전시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예술인들이 돈 걱정 덜 하며 작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문화 기획자로서 저의 목표입니다.
예술가로, 또 기획자로 좋은 모습 보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본 사업은 완주문화재단의 '완주예술발굴 기록화' 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지역 소식지 "2024 11월 완두콩 147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