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하나 된 세상. 예술로 꽃 피는 완주.
WANJU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일러스트, 버츄얼 유튜버 - 허은서
안녕하세요, 완주문화재단 입니다. 완주예술인 기록화 사업을 통하여 14명의 완주 예술가를 만났습니다.
오늘 소개시켜드릴 예술인은 일러스트 작가 허은서님 입니다.
Q . 나의 고향은 어디일까?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2살 때 튀니지로 갔다가 3살 때 사우디로 가서 2~3년 살다가 7살 때 쯤 한국에 들어온 것 같아요.
그리고 10살 때 다시 브라질로 갔다가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아버지의 일로 외국을 많이 다녔어요.
그렇다 보니 고향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제 고향은 어디에요'라고 말하는게 가장 큰 고민거리인 것 같아요.
자라는 곳의 기준이 몇 년 이상 산 곳인지. 10년 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년에도 엄청 많이 바뀌잖아요.?
한국을 떠날 때는 이런 동네였는데, 다녀오면 이전과는 다른데 '여기를 자란 동네라고 할 수 있는건가?' 같은 생각을 해요.
Q . 한국에는 언제부터?
중학교 때부터 있었는데, 한국에서 자랐다고 하기엔 문화적으로 내재 되어 있는 근간이 다른 것 같아요. 저는 한국적인 특징이 없어서 작업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은 하나에 집중해서 파고든다면 저는 잡식성처럼 다양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탐구하게 되요.
Q . 이색적인 학교생활
브라질에서의 생활이 기억에 남아요. 브라질 학교에서는 페라디우스라는게 있었어요. 거기는 영국식 학교여서 기숙사도 있고, 하우스별로 대결하거나,
primary부터 secondary까지 전체 학생이 수학여행을 떠나기도 해요. 통째로 공간을 빌려서 체육 대전표를 짜서 대결하고,
텐트 쳐서 동굴 탐험하고, 배낭 메고 오지 탐험하듯이 밧줄 메고 강물에 쓸려가지 않게 하려고 밧줄 잡고 이런 것들이 좀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브라질이니까 경험할 수 있던 야생이라고 생각해요. 말도 자주 타러 나갔구요.
Q . 나의 적응기
제가 브라질에 있을 때는 얌전한 성격이고 조용했거든요. 근데 한국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나댄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너무 억울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때 까지도 한국에 적응하지 못했어요. 친구들도 저한테 적응하지 못했구요. 의사소통도 어려웠는데, 영어에서 농담 따먹기가 있는데,
한국엔 그런게 없으니까 소통되지 않아서 서로 오해가 많았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당시 저에 관한 근거 없는 헛소문이 돌아서 제가 모르는 애들도 저를 알고 있는 상황 이었어요. 그때 마니또라는 게임을 했는데
저를 뽑은 친구가 선물을 하나도 안주다가 마지막에 100원짜리 작은 캔디를 천원어치를 비닐봉지에 담아서 줬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제가
그 친구를 마니또로 뽑았고 '마니또란 이런것이다.!'를 보여줄 마음으로 매일 아침 쪽지 써서 선물 공세하고, 먹고 싶은 거 사주고 그랬어요.
그 이후로 그 친구가 저에 대해 오해를 한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른 애들한테도 제 오해를 풀어줬어요.
사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고 후유증이 조금 있거든요. 그래도 스스로 부끄러움 한 점 없이 고개 뻣뻣하게 들고 살려고 고생했고 후회하지 않아요.
근데 어린 시절의 패기로 가능했었지, 다시 하라면 지금은 절대 못 할 것 같아요.
Q . 생각의 차이
저는 어릴 때부터 공부만 하기에는 너무 자유로운 사람이고, 궁굼한 것도 너무 많거든요.
외국에서는 'why'라는 질문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대답도 잘 해주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가 어디 있냐며, '그렇다면 그런 거다.'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부모님, 가족들과 갈등이 되게 컸어요.
나중에 엄마는 제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엄마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이해를 했음에도 계속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 하셨데요.
Q . 그림은 언제부터?
학창 시절에 의상 디자인 같은거나 그림도 그리고 그랬어요. 주변에 웨딩 디자인 하는 지인분이 계셔서 남는 천을 받아서 옷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리고 하얀 종이에 선을 그었을 때 입체적으로 변하는 소묘 과정이 재미있기도 했고, 외국에는 쪽 만화책이 없어서 직접 만들기도 했었어요.
소설도 많이 쓰고, 그렇게 다양한 창작을 계속 했던 것 같아요. 이런얘기는 어떻고 그림은 어떻고, 이것저것 보고싶고
뭔가 머릿속이 계속 돌아갔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메모한 노트나 스케치도 많아요.
Q . 예술의 길
아버지는 하고 싶은거 뭐든 일단 해보라고 하시는 분이시라면 어머니는 힘든길 말고 공부해서 쉬운 길로 가라며 예체능을 반대 하셨어요.
저는 원래 고고학을 공부하려고 했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림을 안 그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눈을 감고 있는데 그리고 싶은 잔상이 지나가는 게 있어서 그런 내 속에 있는 것을 표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나> <무녀일홍>
Q . 한국적인 예술활동
다양한 예술활동을 했는데 이건 캐릭터를 그린거에요.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말고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디자인을 했어요.
'지나'라는 캐릭터는 서구적인 아가씨 느낌이지만 한국 아가씨 같은 고등학생이고
'무녀일홍'은 무당에 대한 무서움, 거리감을 친근하게 다가가게 하려고 했어요. 한국에 원래 있던 무속신앙, 무형문화재 인데 일제시대에
좀 사정된 문화가 있고 부정적인 인식도 많이 생겼으니까요.
<배경작업>
또 3D 작업도 했는데 이걸로 짧은 영상을 뽑은 게 여러개가 있었어요. 그때마다 원하는 스토리나 배경을 작업했어요.
그 중 하나가 서양의 SF소설을 한국에서 해석한다면 어떻게 될까? 를 주제로한 영상인데, 판소리 하듯 대사도 넣고, 또 동자처럼 생긴 친구 둘이서
모험을 하는데 처음으로 돌아가서 루프가 되는 식의 이야기로 풀어서 세상의 진리를 알려면 무한 반복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식의 이야기로 풀었어요.
어떤 작업을 하던 기반은 한국적인 내용인 것 같아요.
<일러스트>
그리고 이건 일러스트 작품이에요. 맛집 거리를 활성화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사진을 찍어서 재 해석했어요.
그리고 미래의 유산으로 남을 만한 것들은 역사적으로 오래 되었고, 현재 남아있지 않은 것은 과거의 흑백 사진과 매치 해서 복구 아닌 복구를 하게 되었죠.
항상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섞어서 작업하다가 온전히 실재해 있는 것을 저의 느낌으로 재 해석 하려니 익숙하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존재하는 유산을 작업한다는 거에 대한 부담이 크기도 했구요.
Q . 버츄얼 유튜브?
전공이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이다 보니 사용자의 행위를 함으로써 결과가 이루어지는 인터렉션이라고 쌍방에 관심이 많아요.
시청자의 행동의 결과가 스트리머한테 전해지고, 그 반대이기도 하고요. 지금 사실 2~3개의 통로를 뚫어보는 작업을 생각하고 있어요.
Q . 나의예술 세계
제가 철학을 해서 그런지, 최초의 과학자는 미술, 의사는 다 철학자였기 때문에 예술은 철학에서 시작되고, 철학의 목적은 인간의 본질 탐구와
그걸 통해서 더 나은 의사소통을 위한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이란 결국 내 세계를 알리고 다른 세계를 접하고 공유하는 거니까
한 사람 인생의 한 부분을 엿 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 인생의 한 부분도 조심스럽게 꺼내 보는 거기도 하구요.
그리고 저는 제 경험상 '뭘 해야지!.' 하고 정의를 내리는 순간 작업이 안 되더라구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 느낌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애초에 내가 정의를 내기를 것도 웃기다 생각하거든요. 접하는 사람도 다양한 생각의 여지를 만든다는 생각으로요.
Q . 향후 계획
정의가 없으니 한계가 없고 그래서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생각해요. 저는 특히 디지털 쪽으로 코딩 작업을 하고 있어요. 버추얼에 관해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도 있고요.
AI 프로그램 중 얼굴 근육을 학습시키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내가 이 표정을 지으면 저절로 내가 정해둔 표정이 애니메이팅 연결되도록
학습시키는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의 계획은 표정을 인식해서 저절로 애니메이팅 되게 하는것과
도구없이 자연스러운 트래킹이 가능하게 하는 것까지에요.
Q . 어떤 예술인이고 싶나요?
다른 사람들에겐 사실 별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아요. 흩어져서 사라지고, 잔상처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정도로의 인상을 남기고 싶고
제 스스로는 더 행복해 지고 싶어요. 제 가장 큰 장점은 도임을 가지고 어리게 산다는 것에 있거든요.
철없이 사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시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 시선을 이해하고 유지하며 사람들이 잊어버린 가슴 속 동심을 건드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