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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인현
  • " 우산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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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동지역
  • 전북, 완주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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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소개

우산작가, 박인현


안녕하세요, 완주문화재단 입니다. 완주예술인 기록화 사업을 통하여 14명의 완주 예술가를 만났습니다. 

오늘 소개시켜드릴 예술인은 동양화가 박인현님 입니다. 

 


< Umbrella-인왕제색 >

 

Q . 나의 고향과 부모님

저는 1957년 생으로 당시 한국사회가 전반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김제에서 태어나 7살때 전주로 이사왔어요.

이사 온 곳은 피난민촌으로 기다란 지붕하나에 30여 가구가 모여사는 일종의 다가구 주택이였지요.

수평적 구조로 황토벽으로 앞, 뒤, 좌, 우를 나눠 양옆집의 작은 소리까지 생생하게 전해져서 이만저만 불편했던게 아니였어요.


그럼에도 저희 부모님께서는 "공부를 하고자 하면 도둑질을 해서라도 널 가르칠 테니까 열심히 해라"  라며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제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어요. 그리고 저는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였지요.

 

Q . 우연히 들어간 미술반에서 나의 재능을 알아봐 주실 선생님을 만나다.

​초등학교 5학년 특별활동 시간에 축구반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키가 큰 애들이 먼저 뽑히고 중간 정도에 있던 제 앞에서 순번이 끝나버린거에요.

갈 곳이 없어서 난처 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특별반을 선택하지 못한 학생들을 무작위로 배정을 하는거에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가 그때 배정 받은게 미술반이였어요.

 

"인물을 그릴 때 그냥 밋밋하게 서 있는 사람은 운동감이 떨어지니까 넘어질 듯한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그려야 그럼이 생동감이 넘쳐 활기가찬 그림이 된다."

어머니 같이 포근한 인상의 선생님께서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는데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고 너무 흥미롭게 들렸어요.

이 후 각자 그림을 그려서 제출하라 하셨고 저는 운동장에서 공차는 아이들을 대상 삼아 그림을 완성했어요.

제 그림을 보신 선생님께서 저에게 그림을 아주 잘 그린다며 굉장한 칭찬을 해주셨어요. 

 


Umbrella_-_가을나무​ >                                                   < Umbrella_-_달빛소나타 >

 


Q . 첫 미술대회 수상

미술 선생님은 저에게 소년한국일보주최, 전국어린이미술실기대회 참여를 적극 권하셨어요. 저는 축구대회는 알고 있었어도 

미술실기대회가 있다는 것이 너무 낯설게 들렸죠. 결과에 대해서 아무런 기대도 없었어요. 그래서 대회에 나갔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지요.

 

방학 직전에 하는 종업식으로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있는데 교단위에 웬 트로비와 상품들이 잔뜩 쌓여 있어서​ '누가 상을 받나부다' 생각했는데 그게 저였어요. 

제가 잊고 있던 그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게 된거에요. 아직도 그 트로피를 원본 그대로 잘 보관하고 있는데 

그 트로피를 대할때 마다 당시의 상황이 뚜렷하게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 지곤 해요. 

그 이후에도 선생님께서 각 미술실기대회에 참여를 권했고 저는 참여하는 대회마다 상을 받았어요.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림을 그리면 배고프다는 말이 있어

중학교 진학 뒤에는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멀리했지요.


Q . 미술시작의 계기

중학교 2학년때​ 였어요. 환경미화를 위해 그린 그림이 교실 태극기 밑에 걸리게 되었고 그 그림을 수학선생님이 보시고 유명한 화가분을 소개시켜 주셨어요.

그분이 故박남재 선생님이세요. 수학선생님께서 박남재 선생님을 만나러 가라며 약도와 두툼한 편지를 주셨는데, 

그 편지를 읽어 보신 박남재 선생님께서 석고예수상 각 면을 그려보라 하셨고, 이후 그림 그릴 여력이 되는지에 대해 물어보셔서 저는 그럴 형편이 아니라 말씀을 드렸어요. 

제 이야기를 들으신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부담 갖지 말고 시간이 될 때 화실에 나와 그림을 그리도록 허락해 주셨어요.

 

 

<故박남재 선생님>

 

Q .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저는 원래 서양화로 홍익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근데 그 시기에 1, 2학년 과정에서는 동양화, 서양화, 조소를 모두 이수해서

3학년 때 각 전공으로 나누게 되는 지금의 학부제와 같은 계열을 모집했어요. 저에게는 행운 같은 기회가 주어졌던 거에요.

이전까진 동양화를 접해 볼 기회가 없었지요. 동양화 첫 수업시간에 사군자를 배우면서 화선지에 먹이 잠잠하게 머금으며 스미고 배어드는 현상이

그전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신선함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지요. 수업이 끝나자 마자 바로 붓과 벼루 등 재료 일체를 구했고 이후부터

동양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었어요.

 

Q . 우리의 것

하지만 동양화를 전공으로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어요. 새로운 전공을 한다는 것이 겁나기도 했고 오랫동안 서양화를 해오면서 주변으로부터 인정도 받았기에

결정의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어요. 특히 뎃생 수업 중에는 한 교수님께서 제 그림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뎃생이다." 라는 큰 칭찬을 하셨지요. 그리고 서양화 전공을 간곡하게 권하기도 하셨지요.

하지만, 결국 제가 동양화를 전공하게 된 결정적 판단은 '우리의 것' 이라는 점이였어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지요. 그러니까 서양화는 결국 그들의 모방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생각과

세계적인 작가로 진출은 바로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는 판단에서 비록되었지요.

 

Q . 동양화의 새로움, 빛을 보다.

동양화전공 후 첫 작품은 '맥' 이라는 작품으로 보리를 비닐로 덮어 높은 것을 채색으로 완성한 작품이에요. 당시 전통 회화로서 비닐이라는 소재가 결코 나올 수 없는데

저는 도전적으로 시도했던 거에요. 그 뒤 대학원과정에서 수묵으로 이와 유사한 비닐을 소재로​ '투공' 이란 작품을 이루어 중앙미술대전이라는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선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후 심사과정에 있던 일을 들었는데 제 작품이 지나치게 실험적이고 새롭다는 점 때문에 자칫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는 우려로 대상후보에서 입선에 그쳤다는 거에요.

실험성 짙은 도전적 작품을 추구하고자 하는 저는 이후부터 공모전에 출품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요.

그래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개인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금까지 50여회의 개인전에 이르게 되었어요.


마침 80년대 초부터 우리 화단에서는 실험성 짙은 작품을 추구하는 현대수묵운동이 남천 송수남선생님을 중심으로 커다란 열풍을 일으키게 되는데,

저 역시 주축이 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으로 화단에 굳건히 자리매김 하기에 이르게 되요.



박인현 개인전 -水墨遊戲
​ >


Q . 우산작가

제가 비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대학시절부터 비 오는 날을 기다리다 술 한잔하는 것을 즐겼어요. 

어찌보면 비와 우산은 서로 상대적 개념인데도 비오는 날의 풍경으로 빗속에 받쳐 든 우산은 서정적 낭만의 대명사가 되었지요.

빗속 우산은 사랑, 정, 배려, 나눔, 동행 등의 따스함과 함께 잔잔한 감성마저 자극하여 낭만적 시상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요.

이를 작품으로 연결하기위해 저는 비와 찰떡궁합인 우산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제 작품 속 우산은 문명의 산물로서 현대를 대변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고, 우산이 펼쳐지고 접히는 것에 나름의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지요.

 

1986년 딸이 태어나고 불과 8일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의 허무한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들었거든요.

이 시기 저는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인 죽움에 직면하게 되면서 "인생이란 무었인가?"라는 화두를 떠올리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를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시켜 낼 것인지에 대해 저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우산이라는 매체를 끌어들여 동양의 산수경을 착안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출생-유년-청년-장년-노년-죽음 이라는 장편의 시나리오를 담은 풍경 산수라 할 수 있지요.

이 작품이 1987년에 발표한 약 40m의 '비가...' 라는 작품이에요. 이 전시는 화단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89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에서 선정한 '제8회 석남 미술상'을 수상하게 되었어요.

그 뒤 수많은 언론매체에서 인터뷰, 출연 요청이 쇄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우산작가'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었지요.

 

 

 


<하얀산수 그리고..>

 

Q . 다시 우산작가

제가 33살로 너무 젊은 나이인데 '우산작가'로 고착화 되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어요. 젊었기에 당시 성과에 안주하고 만다면 앞으로 이어질 제 긴 작품 인생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투철한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움에 대한 꾸준한 도전이 제 나름의 작품에 대한 철학이였으며

예술가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짧은 거리를 목표로 하는 단거리선수가 아니라 꾸준히 달려야 하는 마라토너라는 신념이 확고했거든요.

이후 제 작업은 자연을 향한 치열한 구애였어요. 어린시절 자연을 벗 삼아 뛰어놀던 추억들을 연상하며 자연시리즈를 제작했어요.


이 시기의 작품들도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한 작품들임에도 주변인들의 반응은 시큰둥 했어요. 당시의 작품을 두고 궂이 우산작품을 끄집어 내어 서로를 비교하면서

우산작품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곤 했었어요. 그런 아품을 15년을 견뎠어요. 그러고 나니 50살을 내다보는 나이가 되어가면서 저에대한 강력한 이미지를 심어준

우산작품을 다시 연결시키고자 시기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공교롭게도 우산작품으로 초대 요청이 왔어요. 그래서 '2004 다시 찾은 우산전' 이라는 

타이틀로서 우산작품 전시를 열게 되었어요.


지금와서 곰곰히 돌이켜보면 자연을 소재로 한 지난 15년이란 시간은 저에게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작품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양분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요.

근자에 저의 작품들의 주된 대상은 선조들의 작품들을 제 나름으로 재해석하거나, 실존하는 자연물을 대상으로 이룬 '정방폭포', '계산행려도', '금강산 구룡폭포' 등 일명 '우산 산수'라는 명제로서 이루어 지고 있거든요. 그리고 '사과'가 되기도 하고 '새와 나비'의 대체물로 우산이 등장해요.


<'Umbrella - 금강산 구룡폭포(춘하추동)' >



<
Umbrella_-_두개의_붉은사과
>                                                                                  <Umbrella_-_밀어>

 

Q . 앞으로의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작품들을 조금 더 내실화하면서 체력이 허락하는 한 대작들을 중심으로 제작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교직생활도 정년으로 마무리 되었고, 8년 여간 온갖 정성을 쏟아 붙고 공들여 이룬 '연석산미술관'​도 설립취지를 살려 가장 잘 이우러갈 제자에게 넘겼습니다. 

이와 같은 결정은 지금까지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아 그림을 그리며 먹고 살아왔던 제스스로가 이루고자 했던 사회 환원의 일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것은 제스스로 굉장한 복을 받은 사람이라 생각해요. 재능은 출중한데 현실적 여건 때문에 그림을 중도하차해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현실을 감안한다면 말이죠. 저는 사회로부터 받은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했어요. 

이제 저의 또 다른 목표는 작품에 전념하여 더 좋은 작품을 제작함으로서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힐링의 시간을 선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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