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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순
  • " 동초제 판소리 맥을 잇는 소박한 소리꾼 "
  • 분야
  • 공연예술(음악)
  • 세부분야
  • 국악
  • 활동지역
  • 완주군 상관
  • 연락처
  • 010-3679-1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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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소개

동초제 판소리 맥을 이어가고 있는 소리꾼 박정순은 농가주부로써 30대 중반부터 소리 스승인 이일주. 김소영명창을 만나 판소리를, 김유앵선생에게서는 남도민요를 배워 활동해 오고 있다. 박정순은 수상한 경력도 있지만, 기량을 겨루는 일보다 어렵고 힘든 환경을 헤치며 배워 온 소중한 소리가 남들에게 귀하게 들려지기를 바란다. 또한 그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쓰여 진다면 더 바랄 게 없다며, 정성으로 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자신은 자연과 닮은 것이 많다며 엷은 미소를 짓는, 완주를 사랑한다는 소박한 모습이 정겨운 소리꾼 박정순.

 

_

Q. 보통 소리는 어릴 적부터 시작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의 경우는 특별하시다 들었다. 언제 어떻게 소리를 시작하게 되셨는지 그 계기와 과정이 궁금하다.

A : 내가 친정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일찍이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둘째인 딸 아이 출산 후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하고 산후풍을 겪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척추를 지지하는 파이프를 대야만 하는 큰 수술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산후풍도 산후풍이었지만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결혼하여 엄격하기만 했지 다정함이 없는 시부모에 가부장적인 남편, 농촌생활이라 농사일이야 집안일이야 모두를 제가 도맡아 해내야만 했던 시간들이었으니 바깥 출입은 커녕 제대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던 시집살이가 아니었던가 한다. 우리 아이들 둘을 낳고 더구나 큰동서 아이들 셋을 맡아 키워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 시부모님에 아이들까지 아홉 식구를 건사하며 내리 십년을 그렇게 힘들게 살다보니 몸은 어느덧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스트레스에 마음도 극도로 피폐해진 것이 몸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큰 수술을 겪고 나서야 그간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니 내 인생이 하도 불쌍하고 기가 막혔다. 하지만 ‘내 팔자이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아, 이제부터라도 내 인생을 찾아야겠구나, 뭔가를 해야 겠다’ 라고 생각했다. 덧없는 내 청춘이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서른 중반을 넘긴 나이에, 우연히 소리를 하는 지인에게서 “너는 청도 타고 났으니 소리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받았다. 그 시절, 난 국악은 아예 몰랐었다. 그리고 그 때만 해도 사람들은 소리꾼을 천박하게 여기고 있었던 터였기 때문에 남편의 반대가 심했다.

   내가 어렸을 때 친정집은 몹시 가난했다. 어머니는 양식이 떨어졌을 때는 가마솥에 물만 붓고 곧잘 헛불을 때셨다. 어린 나는 철없이 어머니 곁에 앉아 나도 모르게 무심코 하는 행동이 었다. 부지깽이를 들고 뽀얀 물김이 오르는 솥단지와 부뚜막을 두드리며 트롯가요, 주로 이미자의 노래를 처량하게 부르곤 했었다. 친정어머니도 목청이 좋았고, 노래도 잘하셨는데 아마 내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았다. 

   멕시코에 사는 동생이 내 소식을 듣고 불쌍했던지 형부인 남편에게 “제발 언니 좀 하고 싶은 것 좀하고 살도록 풀어 주세요.” 하고, 전화로 통 사정을 했으나 남편은 들은 척도 안했다. 

   대수술 한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부지깽이며 찬물에 손 담그고 그냥 몸빼 차림이 아닌, 박정순으로 살아 봐야겠다고...

   ‘이 처량하고 한 많은 인생, 박정순의 삶을 바꿔보자.’ 라는 생각이 들자 반대하는 남편도 두렵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전북도립국악원을 찾았다. 소리를 배우게 된 것이다. ‘정말 이 한 순간의 시간이 지나면 내 젊음은 사라진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런데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짓말처럼 아픈 것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처음엔 육신의 아픔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스스로 반신반의 하며 공부를 하던 것이 아프던 몸이 아프지 않게 되자 ‘왜 일까?’ 라고 의문을 품다가 생각해 낸 것이 ‘아! 나에게도 끼가 내재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내게 신기가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으며, 남편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소리를 하지 않으면 정말 살지를 못하겠다. 이제 내 길을 찾아가고자 하니 부디 허락해 주시오.” 남편은 나의 간곡한 애원을 들어주었다, 내 안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 준 셈이다.

 

Q. 본래 완주가 고향이신지? 완주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A : 원래부터 완주 상관면 태생이다. 지금은 그래도 도로 사정이 좋아서 들고 나기에 불편이 없지만 옛날엔 수악한 산골이었다. 같은 동네 총각을 만나 결혼을 한 것이 지금까지 여기에 눌러 살고 있다. 완주에서 활동은 상관농협 농가주부 모임도 하고 그 동안 배운 소리 덕분에 완주군 평생교육의 일환인 희망아카데미 사업에 참여하여 어르신들 정서 함양과 치매 예방 등을 위해 지정된 완주군내 마을회관을 찾아다니며 우리 민요로 그들과 함께 신명을 내어 보는 일을 하고 있다.

 

  

 

 

Q. 소리를 얻기까지는 많은 연습. 피나는 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공부를 위해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는지 궁금하다.

A : 도립국악원에서 김미정 명창을 만나 소리공부를 한지 얼마 지나자 판소리반의 조교로까지 활동하게 되었다. 김미정 명창에게서 소리를 받아 집에 오면 밀린 농사일을 하면서도 미친 듯이 혼자 흥얼거리고, 집안일을 끝낸 후에도 밤늦도록 매일매일 공부를 했다. 아마도 그 시절 부수어 먹은 녹음기가 열대가 훨씬 넘었다. 

   소리 길에 들어선 사람들마다 애틋한 사연들은 다 있을 것이다. 오로지 그 길에만 매달리는 사람들 못지않게 나도, 혼자서 다 짊어져야 했던 고된 농사 일, 집안 일 보다도 더 열심히 했던 소리공부였다. 그 때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못할 것 같다.(웃음)....

   돌아 보건데 그렇게 열심히 했던 그 시절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Q. 소리는 구체적으로 어느 선생님께 사사 받으셨는지? 

A : 앞서도 말했지만 전라북도립국악원에 나가 만난 분이 김희정명창이다. 나의 첫 번째 스승인 셈이다. 도립국악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아! 소리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더 큰 스승을 만나 정식으로 소리를 배워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 첫 스승인 김미정명창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대회에 나가 무슨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 한 토막의 소리를 해도, 남들이 듣기에 ‘정말 잘 배워서 잘 하는 구나!’ 이런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그런데 난관에 부딪혔다. 그간 지도해 주던 김미정교수가 완강히 반대를 하는 것이다. 이유인즉  ‘지도교수보다 조교가 더 잘한다.’는 말도 입소문에 들렸고, 자기보다 앞질러 소리를 잘 하는 내가 마땅치 않았던가 보다. 

   그만큼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랬던 교수님을 뒤로하고, 그곳을 박차고 나온 나는, 좀 더 큰 길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도립국악원에서 이미 판소리 동초제를 배우기 시작해서 동초제 소리를 이어온 오정숙국창의 제자인 이일주명창에서 춘향가를 배우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김소영명창을 만나게 된다.

   아는 언니의 소개로 만나게 된 김소영선생님과 인연은 벌써 십 여년을 훨씬 넘었다. 처음 선생님을 뵐 때 선생님은 생활도 어렵고 몸도 편치 않은 상태이셨다. 허름한 집에서 개인 지도를 하고 계셨는데 우울증까지 있으셨다. 소리 길에 든 내 사연과 그 동안 배운 소리를 들어본 선생님은 선뜻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신다는 허락을 해주셨는데, 아마도 구비 진 인생을 살아온 서로의 애달픈 사연들이 어쩌면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서로를 껴안아 주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라 생각된다. 선생님께 심청가 전 바탕을 배웠고,  춘향가. 흥보가의 특장 더늠을 배우는데 선생님은 “아이고 이 사람아 나 죽기 전에 어서어서 내 소리 전부 가져 가게나”하고 늘 말씀하셨다.  

 

Q. 선생님을 대표하는 소리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A : 나는 처음부터 동초제 판소리를 배워 하고 있는데, 동초제라하면 동초 김연수 선생께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다시 정리하고 엮어 당시 새로운 바람으로 밀려오는 창극을 염두에 둔 짜임으로 법제를 만들어서 전수되어 내려온 것이다. 

   동초 김연수명창의 애제자가 오정숙국창인데 말년에 오정숙국창은 이곳 완주 운주로 내려 오시어 동초각을 짓고 사시며 우석대학교 국악과에 출강도 하면서 제자들을 길러 내셨다. 그 중 유명한 제자는 전라북도 판소리를 대표하는 명창으로 이일주, 조소녀, 전주판소리 대사습 이사장을 지낸 민소완 이렇게 세 분이다. 아마도 조카뻘쯤 되는 김소영명창도 어린 나이부터 오정숙국창 문하에서 소리를 배워 동초제의 맥을 잇고 계신다.

   나는 김소영명창에게서 심청가 한바탕을 배우고 이일주선생님에게는 춘향가 대목의 소리를 배워 굳이 나를 대표하는 소리라고 한다면 ‘심청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제는 두 분 다 고인이 되셨지만 전라북도 판소리계의 대부라고 하는 홍정택선생의 부인이신 김유앵선생에게는 남도민요를 배웠다.

 

  

스승인 김소영명창과 함께

 

Q. 소리를 배우시면서 어렵고 험난한 곡절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 얘기해 주실 수 있는지?

A : 이일주명창에게 춘향가를 배우던 때 일이다. 선생님께 소리를 배우러 갔을 때, 선생님께서 내 소리를 들어보시고는 목청이 좋다고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줌마가 이 힘든 공부를 여기까지 견디며 하느라고 고생했다.”하며 나를 받아 주셨다. 대개 선생님들은 주부들은 도중에 포기하고 마는 사람들이 많아 받지 않는데, 감사하게도 특별히 전공자들 사이에 주부인 나를 선생님의 제자로 끼워 주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어려운 문제는 공부보다도 만만치 않은 수강료였다. 

   그 당시의 농사꾼으로서 자식 둘에 동서 자식 셋을 키우면서 교육비야 뭐야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던 때이다. 염치 불구하고 수강료를 깎아 달라고 사정해서 조금 깎아 주셨지만, 가난한 시골 아낙으로 솔직히 그것마저도 부담이 컷었다. 

   소리를 배운지 1년 후, 이수증을 받으라시며 백만원을 요구하셨고, 책거리 비용으로 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돈을 요구하셨다. 그때 나는 눈물을 흘리며 등을 보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난이라는 굴레가 원망스러웠고, 자존심이 상해 울고 또 울었다. 내 사정을 뻔히 아는 선생님인데 그만 두라는 얘기보다 더 힘든 요구인 셈이니, 이일주선생님과의 인연을 일년을 겨우 넘기고 접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 일이 지금까지 소리공부를 해 오는 동안 제일 가슴이 아픈 기억이다. 

   경제적 사정으로 이런저런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오기가 생겨 이를 악물고 소리에 매달릴 수 있었던 동기가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나를 위한 고마운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Q. 소리공부의 정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할 텐데, 연습을 하는 시간은 어느 정도 인가? 매일매일? 또는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하시는지? 

A : 옛날 어른들이 ‘공부는 평생 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말씀들 했는데, 내가 소리를 좋아하지만 본업은 농사꾼이다. 소리를 알고부터 지금까지 연습은 매일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소리를 하는 날보다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일정히 공부하는 시간을 정하고 하기보다, 농사일을 하면서도 허리에 녹음기를 차고 자연을 벗 삼으며 듣고, 또 듣고 따라 부르기를 거듭하며 공부를 했다. 지금 다시 그렇게 공부하라면 못할 일이지 싶지만(웃음) 지금은 그 때 열정 그대로는 아니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이래도 목을 다스리고 소리공부를 한다. 깊은 산골집이다 보니 밤늦게 혹은, 새벽시간에 소리를 내질러도 누구 하나 시끄럽다고 민원을 넣는 사람이 없어 좋다. 아무튼 집착이 심했던 것 같다.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빼면 온전히 연습하는 시간이었으니까. 

 

 

완주군 희망아카데미 민요수업 사진 

 

Q. 현재 소리를 가르치는 활동도 하고 계신다는데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는지? 또한 대중들에게 어떤 국악인으로 기억 되고 싶으신지?

A : 요즘엔 전주나 완주에 살면서 마음만 먹으면 소리공부를 비롯한 여러 예능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좋지만 한편으로는 부작용도 심한 것이 사실이다. 

   소리가 채 익기도 전에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타려고 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 나는 소리공부 십년을 훨씬 넘기고 나서야 선생님이, 대회에 나가 보라고 해서 몇 번 상도 받았지만 아직 대통령상은 받지는 못했다. 물론 상에 대한 욕심도 없다. 

   이제는 노인복지회관을 비롯해서 여기저기 기관이나 단체에서 주관하는 교육사업에 참여해서 어르신들이나 주부, 어린이들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르치고 있다. 내게서 소리를 배우는 분들이 ‘박정순에게서 소리를 배워서 잘한다.’는 그 한 마디를 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젊은이들이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 소리를 전수하고 싶은 제자가 있다면, 익산 모 단체에서 가르치는 제자들이다. 아마 사십대 후반이나 오십대 초반인 몇 사람 있는데 그들에게 조금은 기대를 가지고 싶다. 또 특별한 아이로 부안국악원에 한명 있다. 어느 날 소리를 배우러 오시는 엄마를 따라오는 조그만 아이가 다섯 살이라는데 민요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 아이 이름이 소희인데 처음에 오던 날 “소희야! 여긴 뭐 하러 왔어?” 하고 물으니 아주 또렷하게 “소리를 배우고 싶어서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차고 야무진데가 있어, 목도 보고  싹수가 있나 싶어서 진도아리랑을 몇 소절 시켜보았더니 아주 신통하게도 잘 받아 넘기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수강료도 받지 않고 소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현재, 단가 ‘사철가’ 까지는 마쳤으며 보면 볼수록 욕심나는 아이이다. 소희가 소리를 계속 하겠다면 내가 겪은 어려운 시절을 생각해서라도 레슨비 없이 제자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다. 그리고 소리문이 트이고 나면, 나보다도 더 큰 명창선생님에게 보내어 앞길을 열어 주고 싶은 사랑이 느껴진다. 내 제자로 키우고 싶은 욕심도 있으나 국악계에서 더 큰 소리꾼이 될 수 있도록 키워주고 싶은 것이다. 

   화려한 이력을 갖는 소리꾼이 아닌, 농익은 소리 길을 터득하고, 농가주부로써 열심히 농사를 짓고, 흙과 바람을 닮은 소리를 해서 ‘정말 소리를 맛깔나게 잘 한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소박한 소리꾼이 되는 것이 작은 내 소망이기도 하다. 

 

Q. 선생님이 활동하시는 단체가 있으신지? 그 활동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A : 현재도 몇 군데 기관과 단체에서 소리를 가르치면서도 나름으로 위로는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소리 한바탕을 다 아우르는 완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나도 심청가든 발표회를 가져 보려고, 몸과 마음을 초심으로 가다듬어 흥부가를 공부하고 있다. 하면 할수록 새삼 소리공부는 끝이 없는 것을 실감하게 되지만, 다만 제대로 된 소리를 알고가자 해서 나름대로 공부하고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활동하는 일에 충실하고자 한다. 무슨 큰 영화나 명예를 바랄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전국에 많은 대회가 있는데 그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타려면 기천만원에서 억대를 넘는 돈이 들어야 한단다. 나는 그렇게까지 큰돈을 줘가면서 명예를 얻고 싶지는 않다. 무슨 협회나 단체 활동을 나는 싫어한다. 숨어사는 외톨박이라 한들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끼리 말을 묻혀 사는 것이 싫은 것이다. 

   전주에서 연습실을 마련하고 판소리 동호회원도 가르치고 있는데 ‘소리곶 동호회’이다. ‘곶’이라는 의미는, 바다와 육지가 처음 만나는 지점이 ‘곶’인 것처럼 소리와 사람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 밖에는 김제 문화원. 부안국악원, 그리고 완주군 평생교육사업 등에서 나름대로 활동하며 소리와 남도민요를 가르치고 있다.

 

 

 
완주구경가 발표 사진(좌), 완주팔품가 발표 사진​(우)

 

Q. 국악인 박정순에게 고향인 완주와 소리는 어떤 의미이며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A : 농사를 지으며 살다보니 하늘과 땅, 햇살과 바람을 안고 살게 된다. 누구나 자기 고향이 소중하겠지만, 내가 태어나고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에 머문 삼년 이외는 이곳 완주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육십이 다 되도록 자연 속에서 살다보니, 훗날 내 뼈를 묻을 곳도 당연히 ‘여기구나’ 생각하고, 땅에 씨 뿌려 거두며 살다보니 고향인 이곳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특히 완주는 전설적인 인물인 권삼득국창의 고향이기도 하니, 보람과 자긍심으로 소리의 맥을 이어 가고 싶다. 그리고 어린 새싹들이 소리공부를 하고 싶다면 소중하게 거두어 가르치고 싶다. 재능기부 공연도 하고,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료로라도 가르치기 위해서 나도, 경제적인 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 

   치매예방관리사 자격증도 따고, 일자리가 나면 국악을 통해 어르신들 인지능력을 개선하고 증상을 호전시키는 일들을 하게 될 것이다.  

  

Q. 창작사업의 일환으로 완주를 소재로 하는 소리를 제작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미 2017년도 발표한 완주구경가(九景歌)와 2019년도에 발표하는 완주팔품가(八品歌)가 궁금하다.

A : 완주의 하늘과 땅에 살면서, 또 소리공부를 하면서 ‘내 소리로 완주를 위해 무얼 해 볼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던 끝에 기회가 되어 완주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완주군이 지정한 완주 구경(九景)과 팔품팔미(八品八味)를 바탕으로 홍보도 할 겸 창극과 전통판소리로 엮어 이미 2017년도에 발표를 했고, 올해 11월23일에는 삼례예술촌 소극장 애니에서 발표회를 갖게 되었다. 완주팔품가는 완주군이 지정한 특산물에 저마다 품격을 붙여 놓은 것으로 동상 곶감, 봉동 생강, 삼례 딸기, 고산 한우, 양파 등이 소재이다. 

   이 자리를 빌려 이런 작업에 착수 할 수 있도록 예술인창작지원사업을 주관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주신 완주문화재단에 깊은 감사를 보낸다. 앞으로도 보다 많은 완주군의 예술인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더욱 마음을 써 주셨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며, 더욱 더 힘을 내서 바람직하게 성장하겠다.

 

Q. 끝으로 완주 또는 전북의 국악계를 위해 바라는 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 군수님은 예술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정책과 기반시설을 발전시키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발표한 내 성과물이 완주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동기부여가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 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전북의 국악계를 위한 한마디 고언이라면, 젊은 사람들이 더 열심히 성장할 수 있도록 그동안 헌신해 왔던 사람들이 자리를 물리고 참신한 새 바람이 불 수 있도록 하는 선순환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물도 흐르지 않고 오래 고이면 썩는다’는 고언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감히 드리고 싶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드리고, 주위의 성원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좋은 소리꾼으로 거듭나도록 항시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익혀 완주군의 ‘소박한 소리꾼, 박정순’이 되겠다.

주요 활동
수상
제14회 권삼득국창 추모 전국국악대전 대상
제1회 오정숙국창 추모 전국국악대전 최우수상
제22회 정읍사 전국국악경연대회 대상
제10회 전국 호남가 경창대회 대상
제2회 와룡문화제 전국판소리 수궁가 경창대회 대상

현재
부안국악원 판소리. 민요 지도강사
김제문화원 판소리. 민요 지도강사
익산시 (사)소리뫼 판소리. 민요 지도강사
완주군 희망아카데미사업 판소리. 민요 지도강사 등
필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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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백제예술대학교영상문학과졸업, 시와 소설 등단 후 문단 활동 하였고,
현 한국문인협회, 전북문협, 전북소설협회등, 완주문인협회회장으로 활동중이다.
0800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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