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하나 된 세상. 예술로 꽃 피는 완주.
WANJU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맺음의 풍경
마치 동네 잔치 같았다. 동네 잔치라 말하고 보니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난 각종 근대적인 풍경의 뻔한 클리셰들이 먼저 연상될 수 있지만, 개별적으로 모여든 낯선 이들의 50여일이라는 임시적인 시간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지난 시간을 매듭짓는 자리가 이전에 내가 경험했던 어떤 시간보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50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오랜 시간을 통해 만들어지는 익숙함과 자연스러운 표정의 풍경을 닮아, 내가 제대로 찾아온것인가, 지역의 다른 행사를 보고 있나 하는 착각이 순간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착시의 유발은 올해 예술인 완주 한달살기를 맺는 행사로서 이 사업의 과정과 밀도를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기획되거나 혹은 전시될 수 없는 중요한 성과로 볼 만한 상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가능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곤 하는, 전시를 위해 만들어 놓은 구조물 위를 거침없이 오르락 내리락 하며 노는 아이들, 민망해하며 말리는 함께 온 양육자, 괜찮다면 저어 말라는 작가들, 예술을 하대(?)하며 격 없이 즐기는 모습을 목격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치 않다.
경탄할 준비
6개 팀의 이야기들은 진솔하고 유쾌했다. 예술가로서 완주의 곳곳에 머물며 새롭게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 동시에 완주에 오고 싶었던 더 근본적인 동기이기도 한, 기존의 자신의 삶이 처했던, 아마도 강요받거나 혹은 타자화된 거절할 수 없는 요구들로 인해 지치고 지루해진 스스로를 돌파할 기회에 대한 기대 사이의 어느 지점들이었다. 어떤 것이 진짜 내가 바라는 바인지, 여전히 강요된 요구를 1도 벗어나지 못한 채 내면화된 관성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등의 조심스러운 질문들이 완주에서 마주친 사람, 풍경, 시간, 공간 등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들의 글과 사운드, 사물, 목소리, 퍼포먼스는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완주에 머물기 때문에 일어났던 경험과 사건의 예술가로서의 시선이었고, 비로소 이런 것을 두고 완주예술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과 성과 이면에는 참여한 예술가들 사이에 만들어진 교감과 관계의 두께가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각자의 작업을 나름의 예술 언어로 시연하고 보여줄 때 누구보다 가장 적극적인 관람객이 되어 기꺼이 몰입해주고, 박수 쳐주는 서로의 존재가 되어주고 있었다. 격려하며 우정을 나누는 모습, 우리는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마음을 놓고 무엇을 해도 좋다는 서로를 향한 신뢰의 몸짓은 우리가 예술이나 예술가를 통해 경험해야 할 예술적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경탄할 줄 아는 예술가의 태도’ 말이다.
무엇에서 비롯되었을까
단편적인 장면의 목격에 비해 지나친 감동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와 같은 의미의 드러남은 분명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짧은 기간, 알지 못한 이들의, 이주라는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러한 가치의 성과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시간이 삶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극히 이벤트적인 임시의 머무름이지만 출퇴근이나 프로그램 등으로 설명되지 않는, 형식화되지 않은 시간의 가능함은 일상, 사는 것으로 연결된다. 예술가에게 작업과 일상이 명료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목적하지 않은 우연의 순간으로서, 예술 작업으로 구획되지 않은 시간과 언어의 영역인 ‘생활’에서 마주치는 예술적 영감은 예술이 삶이고, 삶이 예술임을 일깨운다. 산책을 하고 매 끼니를 누구와 어떻게 먹거나 해결할지, 장을 보고, 그냥 어슬렁거리며, 때로는 마주친 주민에게 멋쩍게 말을 걸며 어색함을 견디었을지도 모를 그렇고 그런 각자의 하루하루가 가능했기에 예술가로서의 존재도 다양한 감각으로 일렁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라포형성이나 리서치의 이름을 둘러 프로그램을 위한 도구, 수단인 것과는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그 자체로서의 삶 말고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완주에서 경험한 어떤 순간들이 너무 근사하고 놀라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는 한 참여작가의 말은 완주에서의 일상과 예술적 순간의 일치를 떠올리게 한다.
방향으로서의 커뮤니티와 예술
애초 예술인 완주 한달살기는 공공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적 상황을 보완하기 위한 정책적 기획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안다. 지역 문화정책의 시선에서 빈 마을 공간의 재생과 주민들의 문화복지 확대를 위해 예술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고령화와 인구감소로 인한 여러 사회적 문제들에 접근하는 문화적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재원의 변화로 2023년부터 아르코 공공예술지원사업의 맥락에서 예술인 완주 한달살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게 아닐까 한다. 근본적으로 지역 내 문화예술의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 이전에, 또는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과 대립하는 구도로서가 아닌) 이와 다른 차원의 의제로서, 예술에 대해, 추구되어야 할 예술적 질문에 대한 요청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목표가 아닌 방향으로서의 커뮤니티와 예술에 관한 탐색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지역의 문제로 흔하게 언급되곤 하는 활용/가용의 자원 시각에서 진단된 결핍은 자본의 시각에 치우칠 수 있는 관점의 결함을 내포하고 있어 마냥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한 시각은 소수자성, 전환적 태도에서 재맥락화될 수 있는 지역적 가능성을 회피하거나 저평가하게 만들기도 한다.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지역을 새롭게 읽어낼 필요성에 대한 실행적 계기로서 예술과 예술가의 존재가 절실하고 지역은 그들의 사유를 곁눈질하며, 미시적인 감각과 감수성으로 발견되고 해석되며 만들어지는 새로운 서사와의 낯선 연결에 동참하게 된다. 한 달 살기의 ‘한 달’은 가능한, 동시에 지속적일 수 없는 한계의 문화적 장치로서, 이러한 질문을 집약적으로 극대화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예술가들의 샛길 기술에 기대어
제도적 주문을 강력하게 내포하고 있지만 ‘살기’는 ‘한 달’과 더불어 예술가로 하여금 호기심과 관심, 할 것에 관한 다양한 샛길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삼천포로 빠지는 예술가의 기술은 살기를 통해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한다. 요구에서 자유로우면서 함께 날뛸 안전한 동료와 부추길 주변 사람들이 있는 희귀함을 올해 완주에서 경험했다고 간증하는 참여 예술가들의 들뜬 목소리는 과장이 아닌 듯하다. 행정 체계의 구분이자 대상으로서의 지역, 완주를 넘어 이 시대의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으며 탐색할 수 있는 질문 즉, 예술과 지역, 예술가와 공간이 사유와 실천의 매개로서 이 사업이 자리하길 바란다.
뜨겁고 마른 열기마저도 완주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던, 막연하고 다소 감상적이지만 완주를 향한 나의 가울어진 마음과 함께 전하고 싶다.
글 : 임재춘
예술인 완주 한달살기를 2023년 아르코 공공예술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리뷰하였고, 2024년 참여예술인을 심사하는 일련의 과정에 관여한 인연으로 마무리 자리에 함께 하였다.